선교사의 사역의 내용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제 3세계에 있는 교회는 성장하고 있으나 서양권은 여전히 갈등 중에 있으며, 문화를 넘어가는 선교 사역은 점점 비서양권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접근 방식도 변화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반드시 일어나야 하고 또한 기뻐할 일이다.
백투 예루살렘 운동과 친숙한 이들은 중국의 가정 교회는 10/40 창 지역에 선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들의 교육과 생활 수준은 선교 대상자들 보다 비슷하거나 가끔 더 낮은 경우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생활을 위해 스스로 해결하며, 혹은 그들이 정착할 지역에서 작은 비지니스를 시작하여 사람들과 만날 수 있고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는 도구로 삼는다. 이러한 접근은 경제적 지위나 정치적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동일한 지위나 혹은 더 연약한 지위로 부터 행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 방식을 가리켜 ‘취약한 낮은 선교사들’ 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반대의 형태인, ‘강한 선교사들’ 로 비교 해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선교사들은 지도자나 혹은 도움을 주는 높은 자들의 형태를 취한다. 예를 들면, 그들은 의사나 간호사, 교사나 목사, 혹은 지역의 경제를 일으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술자나 사업가들이 대부분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은 더 나은 교육과 그들이 섬길 사람들 보다 더 부유한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그들이 사역하는 곳이 너무 벅차다면 언제든지 그들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비교적 안락한 삶으로 돌아 갈 수 있다.
이런 ‘높은 선교’의 강한 접근 방식은 신학적 선택이라기 보다는 20세기의 경제적 실제의 자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보통 기독교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부유하였고, 그렇지 않은 나라들은 가난한 지역이 많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고통과 가난에서을 벗어 나도록 노력을 함께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한국은 부와 전통적 ‘강한’ 선교가 연결된 접근 방식의 예가 될 수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선교적 활동을 받던 가난하였던 나라로서 많은 학교들과 병원들이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서 나라와 교회가 부유해지자 그들은 같은 방식인 ‘강한 선교’ 접근을 사용하고 있고, 지금은 교육이 높은 의사나 신학자들을 온 세계에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파송하고 병원과 학교를 세운다
그러나 제 3세계에 있는 선교 지향적 교회들은 이런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들을 교육시키거나 후원하거나, 인도주의의 대단한 프로젝트를 하거나 교회를 지을 재정적 자원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보통’ 이민자로 가는 것이다.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모르는 곳에 가서 생활을 하며 나눌 기회를 찾는 것이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현지 주민들과 같거나 혹은 더 낮다
‘취약한 낮은 선교사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의도하지 않은 선교사들. 그들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나라를 떠났으나그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의 대강령을 함께 가져간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중국이나 필리핀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이민 간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이 선택한 나라에서 노동자들로서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들은 때로 직업적으로 하인이나 더 낮은 계층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중국 가정 교회 선교사들과 같이 그들은 모든 서양 선교사들을 의심하는 모든 곳과 기존 선교사들의 전통적인 사역이 허락되지 않는 나라들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리고 중동 지역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도피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망명 신청자들을 위한 유럽 센터에서 기다리는 몇 달이나 몇 년 동안, 함께 난민촌에 있게 된 모슬렘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가끔 그들은 서유럽의 가장 세속화된 도시 가운데서도 이민자들을 위한 교회를 시작하여 자신들 뿐만 아니라 이후에 자신들의 주인이 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았던 선교사의 또 다른 예는 가정의 도우미들이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부유한 중동 가정으로 들어 간 젊은 그리스도인 자매를 생각해 보라. 그들은 취약성을 가진 지위에 있으며 가끔 혹독한 취급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또한 자신들의 믿음을 집안 전체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고 자신들의 섬김을 나타낼 수 있는 특별한 위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매들은 나아만 가정에 들어 간 유대의 계집종을 연상케 한다. 그녀는 문둥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주인에게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를 소개하였다. 그로인해 나아만은 육체적으로 치유를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강한”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좋은 것에 감사하는반면, 취약성 있는 사역으로의 이양을 적어도 상호 보완적인 접근 방식으로라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새로이 보내는 나라들의 경제적 상황 때문 뿐만 아니라, ‘강한’ 선교의 하향식 낙하산 접근법은 어느 정도 내재된 약점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선교사들과 그들이 섬기는 사람들 간의 경제적 차이는 때로 상호간의 대등한 관계를 쌓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과, 그것이 새롭게 시작하는 교회들에게 건강치 못한 의존성을 낳게 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정치적 현실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나라들은 (예를 들면 중국) 무역에서 더욱 영향력이 있게 되고 군사적으로 더 성장하게 됨에 따라 서양인들은 그들의 특권을 급속히 잃어 가고 있다. 중동에서는 서양과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던 독재자들이 서양인들에게 훨씬 더 적대적인 이슬람 정권으로 교체되었다. 서양인들이 접근 기회를 잃게 됨에 따라, 다른 이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여야 하여야 한다. 접근 방식은 다르나, 닫혀 있거나 닫혀 가고 있는 나라들에게 복음을 전할 같은 마음으로 그들을 대신 할 자들을 필요로 한다.
마지막으로, 서양에 있는 교회가 계속 하향을 계속하고 자원은 고갈되어 가고 있는 반면에 세계 선교의 움직임은 더욱 더 이러한 취약한 선교사들에 의해 의존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이 일을 마칠른지.
카지사는 현재 그녀의 가족과 한국에서 살고 있으며 정치, 경제, 그리고 영적 발전에 대해 집필하고 있다